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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다] 온라인 쇼핑 판매자 환불 거부 중.... 뭐 이런 경우가 있나요;;
1. 제가 운영 중인 업장에 화장실 문이 오래되고 녹슬어서 교체를 하기 위해,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에서문고리를 전문적으로 파는 업체에서 아래와 같은 이미지의 “욕실용 동전형 문손잡이” 3개를 주문 하였습니다. 2. 그러나 판매자 실수로 “욕실용 열쇠형 문손잡이”주문과 다른 상품으로 오배송 되었고,실수로 한개 상품을 개봉하여 1개를 제외한 2개 교환을 요청하고, 어떤 택배사로 선불 혹은 착불로진행해야 하는지 문의하기 위해 판매자 업체 대표번호로 수차례 연락을 해도 받지 않고판매자 문의로 제 번호로 연락달라고 요청 하였으니 “오배송시 교환으로 접수하시면 됩니다.” 딱 한 줄메세지만 받아서, 저는 판매자의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여 네이버페이 교환 접수 후 편의점 택배 착불로상품을 보냈습니다. 3. 얼마후 판매자가 교환을 거부한다는 알림 메세지가 떳고, 판매자는 "지정 택배가 아닌 구매자 임의로 택배를발송하여 추가 배송비 6200원이 발생됬고 이를 저에게 청구하고 배송비를 받기 전까지 교환이 안된다고 합니다.저는 혹시나 저의 실수나, 추가 택배비를 결제하려면 계좌번호라도 알기 위해 수차례 유선 번호로 연락 하였으나역시 받지 않았고, 판매자 문의로 다시 제 번호로 회신 부탁 드린다고 메세지를 남겼으나 답변이 일주일이 넘도록없었습니다. 4. 아무리 유선번호로 연락하고, 메세지를 보내도 답이 없었고 최초 결제한지 보름이 넘어갑니다.저는 인내심에 한계에 다다라서, 네이버 페이 고객센터에 "제가 추가 배송비를 지불해야할 이유도 모르겠고판매자는 연락도 안되니 직접 환불처리 해달라고 요청 하였고 아래 이미지와 같이 "판매자와 무상 환불로 협의되었다"고 답변을 받았습니다. 5. 그래서 다시 환불요청을 했는데, 일주일이 넘도록 판매자가 환불 승인을 안 해줍니다.그리고 나서 오늘 다시 추가 배송비를 부담해야 한다고 하면서 임의대로 환불 하지 말라고 합니다.설마 네이버페이 고객센터에서 판매자와 무상환불 협의를 거짓말로 했을까요???아무리 봐도 네이버페이 측과 협의 사항을 무시하고 고객에게 책임을 전가 하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6. 이제 한 달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판매자에게 수십차례 통화를 시도 했고, 제 유선번호도남겨서 회신을 부탁 드렸으나, 단 한번도 연락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전에 지정택배사가 어딘지? 어떻게환불이 진행되는지 판매자로 부터 전혀 고지를 못 받았고요, 너무 답답해서 판매자의 다른 상품 환불 규정을 찾아보니 아래와 같이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7. 분명히 위에 “오배송 등에 따른 청약철회” 항목에 “판매자 통화후 처리” 이렇게 명시되어 있습니다.그러나 상품 소개 맨 밑에 안내 사항은…… 8. 감정노동자 권리 보호를 위해 전화 상담은 불가 하다고 합니다;;;;;;;;;;;;;;;저도 자영업 하는 입장이지만, 하다 하다 고객민원이나 서비스에 있어서 전화 상담을 거부하고게시판을 통해 소통하는 업장은 단 한 곳도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위에 제품 하자, 오배송의 경우“판매자 통화후 처리”라고 명확히 명시되어있는데, 판매자는 전화를 쳐 받지 않습니다.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제가 도대체 뭘 잘못했을까요?, 왜 판매자는 지가 실수로 오 배송 쳐 해놓고교환에 대한 고지와 고객과 소통도 없이 고객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추가 택배비 지불을 요청 하는 걸까요??? 진짜 별거 아닌걸로 한달 넘게 스트레스 주면서 고객을 개똥으로 취급하며 고작 37000원 짜리 문손잡이 환불 하는게 이렇게 어려운 건가요?금감원이나 소보원에 신고 가야 하나요??? 짱공 유저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 ++ 사건의 정황을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내용 추가합니다. 제가 문손잡이를 구매하고 나서 바로 다음날에 “판매중지”처리 되어 위에 이미지와 같이구매한 상품 페이지에서, 교환.환불 규정, 지정택배사를 찾을 수가 없었으며, 이를 문의하기 위해최초에 판매자 유선번호로 연락이 되질않아 판매자 메시지를 보냈으나… 메세지를 보낸지 5일 후에나 위와 같이 교환.환불규정 지정택배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고“오배송시 교환으로 접수하시면 됩니다" 라는 답변만 받았고요, 제가 지정택배사를 모르고 택배를발송한건 제 책임일 수도 있으나, 현재 제 사업장에 일부를 셀프 리모델링을 진행 중 이고 하루빨리 리모델링을 마무리 짓고 바로 장사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 빠르게 교환을 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타사의 택배로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5일이 지난 후에야 딸랑 교환으로 접수하면 된다고 답변을 받았고, 그 이후에도 어느정도 제 잘못이 있다고판매자에게 설명이라도 들었다면 계좌번호를 받아서 추가 배송비를 지불하고 빠르게 교환을 받았을겁니다. 그래서 메세지에 제 번호를 남겨 놓고 회신을 부탁 드린다고 하고 메세지를 보냈는데도 일주일이 넘도록 아무런 연락도 답변이 없었고요, 그래서 제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네이버페이 고객센터를 통해 판매자와 연락도 소통도 전혀 안되고 있는 상황이며판매자의 오배송 건에 대한 교환 환불 규정에 대한 아무런 고지 안내도 없이, 추가 배송비를 내가 지불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으니 무조곤 무상 환불을 요구 한 것이고요 바로 어제 네이버페이의 중재로 결제 한지 25일 만에 추가 배송비 없이 환불 처리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판매자는 여전히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으며, 순전히 니 잘못이고 본인은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둘러대면서, 고객을 우롱 합니다. 누구나 다 사회 생활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데, 고작 37000원 짜리 제품에 추가 배송비 4200원을부담하지 않는다고 거진 한달째 연락도 소통도 제대로 안되면서, 질질 끌면서 신경쓰고 스트레스 받아야 하는일인가? 저는 도저히 납득이 안되고, 이딴식으로 장사하는 자영업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만약에 어제라도 판매자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미안하다 사과 한마디만 했으면 저는 그냥 넘어갔을 겁니다. 고작 4200원 배송비 안 줘서 제가 진상짓 한 꼴 밖에 안되니까요 근데 오늘 판매자의 답변 메세지를 보고, 진심으로 법정 가서 소액 재판으로 내 돈 수백만원이 깨져도이런 쓰레기 같은 장사꾼 세끼 엿을 먹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집안에 변호사 어르신 만나 뵙고어떻게 대응 해야 할지 조언을 듣고, 법정으로 가서 끝을 볼 건지 고민 중 입니다. 일단 네이버페이 고객센터에 신고하여, 판매자 패널티 적용을 요구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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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다] 회사 내 지게차 접촉 사고 관련 문의드립니다.
회사 내 지게차 접촉 사고 관련 문의드립니다.경험 있으신분 좀 알려주세요,,넓은 마당에 주차하고 기다리시라 했는데, 저를 쫓아 오고 계셨더라고요.지게차 후진하던중, 차가 저를 쫓아오는지 모르고,방향 꺽던중 부딪혀서, 앞범퍼 및 운전석쪽 문짝이 좀 먹었습니다.3.5톤 기사님은 차량에 탑승해있었고, 회사에 문의해보니 지게차 보험 및 영업배상책임보험이 없다고 하네요.그래서 머리굴려서, 회사 차량이랑 접촉사고 난거로 하고 저희쪽 차량보험이랑 진행하려고 했으나,보험사기인지라,, 상대방쪽에서 접수를 취소해달라 요청을 하시고, 자차로 처리한다 하시네요.구상권 청구가 예상되기는 하는데, 시간도 시간이고, 빨리 처리하고 싶어서요.카센타에 견적 보시고, 우리쪽으로 보내주면 차량 수리 해드리겠다.병원가시는건 저랑 개인적으로 합의좀 하자 했는데, 일단 자차 접수해서 연락 주신다고는 하는데요.이런 경험 있으신분 계신가요??회사에서는 다 부담해준다고는 하는데, 구상권 청구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이 넘어올까봐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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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공일기장] [자작글]나도 존잘남이 되어보자 -1
여름 휴가 때 할 것도 없고 심심해서 적어본 걸 올려봅니다.예전에 조각으로 적었던 글들도 그냥 다 섞었어요. 1부 탁자 위에 먹다 남은 족발과 빈 소주병 2개가 흐릿하게 보이고 갑작스런 졸음이 몰려와 거실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아이들의 웅성거림에 눈을 떠보니 초등학교 교실이었다. 이건 꿈인 걸 금방 알아챘다.앞에 있던 내 오랜 친구가 20년 전 모습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너는 맨날 학교에서 잠만 자냐?”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느낌에 옆을 보니, 첫사랑 설희가 새침하게 날 보고 있었다. “승훈이는 좋겠네? 잘생기고 인기가 많아서.”“응? 무슨 말이야?” 설희는 손짓으로 앞에 보이는 칠판을 가리켰고 거기엔 우리 반 인기투표 결과가 적혀 있었다. 강승훈 26표임찬정 6표차언우 8표 우리 반에서 인기가 제일 좋은 남자로 뽑힌 그 때 그 상황이었다.내 옆에 앉아있던 설희는 개표 결과가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렇게 좋아?” 그 당시 설희는 이웃집에 살고 있었고 내가 많이 좋아했었다.그런 설희의 얼굴을 보니 꿈속에서도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여전히 그리운 그녀에게 왜 내게 연락도 없이 떠나버렸는지 묻고 싶었다. “너 왜 날 떠났어?” 꿈속의 설희는 말없이 빙긋 웃고 있었고 그렇게 잠에서 깨어났다.잠시 동안 너무 생생해 꿈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소파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보니 보이는 건 먹다 남은 족발과 커다란 배만 보였다. 욕실 입구 옆에 놓인 체중계에 올라갔다. 어제 족발에 막국수까지 먹어서 그런지 120키로가 훌쩍 넘었다. ‘183센티에 126키로라, 합치면 310이네. 오늘도 기록 갱신이구나.’ 체중계에 찍힌 숫자를 보니, 잠시나마 두근거렸던 가슴은 금방 진정이 되어버렸다.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던 중, 아침부터 휴대폰 벨소리가 들려왔다.벨소리가 끊이지 않고 점점 늘어나자 여친이라 확신했고 물기를 대충 닦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주글래? 전화를 왜 이리 늦게 받아?” 신경질적인 여친의 목소리에 주눅이 들었다. “미안……. 씻는 중이라서 늦게 받았네.” 그녀는 슬며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한 동안 오빠를 예쁘게 대해줬더니 이제 막 기어오르네?” 농담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항상 내 위에 자기가 있다는 그런 자신감이 가득한 그런 목소리였다.자존심이 너무 상할 때는 한 번쯤 큰소리로 욕을 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녀가 더 화를 낼까 싶어 참았었고, 지금도 그냥 웃고만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감히 우리 공주님에게 기어오를까?” 갑자기 여친은 어제 친구들과 만났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빠 어제 친구 만났는데.”“응, 어제 술 한 잔 한다며?”“응, 그런데 그 계집애 가방이 바뀐 거야.”“아, 그래?”“응, 내가 너무 가지고 싶은 구찌 신상인데. 근데 가방이 너무 예뻐서 어디서 샀냐고 물으니깐…….” 끝말을 늘어트리며 살짝 뜸을 들였다. “그러니깐?”“자기 남친이 사줬다더라. 진짜 부러웠어.” 가방을 사달라고 운을 띄우는 걸 눈치 챌 수 있었지만, 그저 모르는 척 의미 없는 웃음만 흘렸다. “채린아, 그런데 구찌 가방이 비싼 거야?”“에이, 장난치지 말고 구찌 몰라? 얼마 안 해.” 여성 가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생각나는 가격으로 다시금 물어봤다. “구찌 들어보긴 했는데. 얼마 정도 해? 한 50만 원 정도 하나?”“오빠! 진짜 왜 그래? 진짜로 구찌 몰라? 사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해. 구질구질하게.”“아냐, 진짜 가격을 몰라서 그런 거야. 내가 그런 거에 관심이 없어서 진짜 몰라서 그래.” 내 말을 듣고 잠시 진정하던 채린이는 한 번 헛기침을 하고는 목을 가다듬었다.그리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달에 내 생일인데 구찌 사주라.”“그래, 그런데 그거 얼마나 해?” 채린은 가격을 묻는 말에 애교가 듬뿍 들어간 콧소리를 내었다. “난 내가 봐 놓은 가방이 있는데 330만원 하던데. 사줄 수 있지?”“뭐? 얼마?” 단전에서 올라오던 수많은 욕들이 목울대를 지나 입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결국 그냥 삼켰다. ‘잘 못 들었겠지. 무슨 가방이 그리 비쌀까?’ 잘 못 들은 것 같아 다시 물었고 그녀는 또박또박 정확하게 말했다. “330만원이야, 오빠.” 제대로 들은 거라고 생각 드는 순간 나도 몰래 한숨이 길게 뿜어졌다. “하……. 얼마 전에 화이트데이라고 금팔찌 해준지가 언젠데 또 가방을 사달라고 하냐? 너 정말 나 좋아해서 만나는 거 맞아?” 놀란 듯 그녀의 숨소리가 들리고 약간의 정적 후 그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내가 호구로 보이니깐 맨날 선물 아님 용돈 달라는 거 아냐?” 짜증이 섞인 신경질에 그녀는 놀랐는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곧 머릿속으로 할 말을 다 정리한 둣, 아주 신경질 적이고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깟 선물 얼마나 한다고 신경질이야? 그래! 나 너 안 좋아한다. 됐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헤어지자고 할까봐, 불안감이 커지며 이내 주눅이 들어버렸다. “그게 아니라. 아침부터 전화해서 선물 사달라고 하니깐. 내가 조금 흥분 했나봐…….”“사귀는 사이끼리 선물 해 주는 게 무슨 대수야? 그게 큰 벼슬이야?” 처음 만날 때부터 갑과 을의 사이로 만났기에 또다시 습관적으로 숙이며 들어갔다. “그래. 내가 조금 전 흥분해서 미안해”“됐고! 이제 내가 연락하기 전에 연락하지 마!”“왜 그래. 채리...” 분명 기분 나빠 할 줄 알면서도 말하는 중에 채린은 전화를 끊어버렸다.내 곁에 없으면 아쉬울 것 같던 그녀였지만, 연락을 하지 말라는 말에 마음이 더 편해졌다.처음엔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힘들었는데, 더 이상 상할 자존심도 없는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채린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친구와의 술자리였다.아는 동생이라고 나왔던 그녀가 처음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선물 공세로 매달려 지금은 내 애인이긴 했지만, 알고 지낼수록 백화점에서 일하는 그녀는 허영이 너무 과했다.한 번씩 질릴 때마다 헤어지려고 해도 어디 가서 또다시 여자를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고민도 많이 했었다.오래 전 헤어진 설희에게 여전히 미련이 있었고, 주위에 조금만 물어보면 만날 기회가 있었다.하지만 지금의 내 모습을 보여주기가 너무 싫었다.그래서 지금의 여친을 계속 만나곤 있지만, 내게 상처만 주는 그런 여자여서 너무 힘들었다. 아침부터 여친의 투정에 심신이 지쳐버린 상태로 출근했다.주차를 하고 회사 입구에서 지원팀의 정보람과 영업팀 임찬정 대리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찬정이는 초등학교 동창이지만 살이 찐 나를 못 알아보고 먼저 입사한 선배로만 알고 있었다.이런 내 모습으로 아는 척하기도 껄끄러워 그냥 얼굴만 알고 서로 대화도 거의 안한 상태였다.그런 찬정이가 검은 색 봉지를 정보람에게 건네는 모습을 보며 사무실로 향했다.출근을 하자마자 커피를 마시려고 탕비실로 들어갔다.이내 지원팀 후배 보람이도 탕비실로 들어왔고 눈이 마주치자 내게 인사를 건넸다. “강과장님은 이런 거 좋아하시죠? 누가 나 먹으라고 주던데 요즘 몸매 관리한다고 먹기가 좀 그래요.” 조금 전 찬정이에게 받았던 봉지를 내밀었고 봉지 안을 보니 캔 커피와 과자 여러 개가 들어있었다.옆 부서에서 일하고 있어서 잘 마주치지 않던 보람이는 뚱뚱하다고 평소에도 눈길도 주지 않았다.그리고 말을 걸어도 늘 건성으로 대하던 후배였다.그런 여후배가 간식으로 나를 놀리고 있었다.미소를 보이는 얼굴에 대놓고 별다른 말도 하지 못하고, 건네는 음료와 간식을 받아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바로 안 드시고 모아두는 거예요?”“나중에 먹을 게. 고마워.”“고맙긴요. 과장님 체격 유지하시려면 부지런히 드셔…….” 놀리려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자, 말은 끊고 보일 듯 말 듯 한 목례를 하고는 자기 부서로 돌아갔다.예전 사내 휴게실에서 친구와 통화 하는 것을 우연찮게 들은 적이 있었다. “우리 옆 부서에 연구실 뚱땡이도 여친 있다는데, 난 이게 뭐야?”“잘생기면 최고야. 평생보고 살 건데. 돈도 좀 있으면 당연히 좋지.”“호호호, 그래 난 얼굴 뜯어먹고 살 거다. 이 기지배야.” 들은 것을 말할 수도 없고 나를 꼭 집어 얘기한 것이 아니라고 발뺌을 할 수도 있어 모른 척 했었다.그 때부터 내게 보이는 호의는 가식처럼 느껴지는 참으로 껄끄러운 사이였다. 평소엔 간간히 문자오던 여친은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연락 한 번 없었다.기다리진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수시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자신이 한심해졌다.솔직히 그녀는 처음부터 내게 조금의 호감도 없었을 것이다.우리 집이 제법 살만하다고 해도 아주 큰 부자는 아니었다.또 내 키는 남들보다 크다 하더라도 식스팩의 꽃미남도 아니었다. 다리를 다치고 난 뒤 공부만 하다 보니 두꺼운 안경을 쓰는 뚱뚱한 남자일 뿐이었다.그런 내가 먼저 자처해서 채린이에게 고백을 하고 스스로 약자가 되어 숙여 들어갔었다.거의 매일 이어지는 채린의 투정을 들을 때마다 오늘도 짧은 결심과 포기도 이어졌다. ‘여기서 진짜로 끝내? 아니야, 내가 또 어디 가서 저런 여자를 만날까?’ 자주 이런 생각으로 그녀와 만난 지 2년이 다 되어갔다.하지만 그녀와 간혹 있었던 좋았던 기억으로 버티고 있었다.또 한 번씩 좋았을 때가 있어서 그 때를 떠올리면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하루를 채우고 퇴근시간이 될 때까지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한 통의 전화, 한 통의 문자 조차하지 않았고 오지도 않았다. 퇴근길에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려고 집 근처 돼지국밥 집에 주차를 했다.그 때 채린이와 같은 백화점에서 일하는 정화라는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뭐해요?”“정화야, 오랜만이네. 그냥 밥 먹으려고 식당 앞에 있어.” 채린과 데이트를 하면서 그 주위의 친구들을 종종 만나 밥을 사주곤 했었다.내 위에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채린이를 유일하게 나무라던 여자가 정화였다.지난 달 마지막으로 정화를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채린이가 일하는 백화점 인근의 큰 횟집에서 우리 세 사람은 술자리를 가졌었다.술자리가 길어질수록 우리들은 점점 취했었고 얼굴이 빨갛게 변한 정화가 내게 물었다. “오빠도 살 빠지면 나쁘지 않을 인물인데 운동 같은 거 안 해요?” 평소에는 그냥 흘렸을 테지만 그날따라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도 군제대하고 22살 때까지는 진짜 인기 많았는데, 잘생겼다는 말도 매일 듣고 성격도 활발했었거든.”“그래요? 그 때는 지금처럼 덩치가 크진 않았나요?”“아, 그때 알바 하고 집에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었어. 휴대폰보고 걷다가…….”“에휴, 어쩌나. 그래서요? 지금은 괜찮아 보이는데 다 나은 거 맞죠?” 옛 기억을 떠올리며 앞에 놓인 소주를 들이켰다. “다리가 작살나서 병원에 한동안 입원 했었지, 불행 중 다행은 눈에 보이는 장애가 없다는 정도?”“그럼 그 때 이렇게 덩치가 커진 거예요? 에구, 혹시 제가 또 말실수 한 건가요?” 조심스럽게 말하는 정화에게 괜찮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뭐 뚱뚱한 사람을 뚱뚱하다고 하는데 무슨 실수야. 그땐 운동을 좋아해서 평소에 많이 먹었는데, 다치고 나니깐 먹기만 많이 먹고 운동을 안 해서 이렇게 됐지 뭐.” 정화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오빠만 괜찮으면 채린이랑 같이 간단하게 등산이라도 할래요? 저 한 번씩 산에 가는데.”“아니, 운동하기가 겁나서……. 다리에 무리가 갈까봐.” 그 때 내게 계속 말을 거는 정화를 보고는 기분 나빴는지 채린이가 끼어들었다. “자꾸 그렇게 챙기는 척 하지 마, 오빠 버릇 나빠진다.” 정화는 내 편을 들며 말했다. “그래도 오빠인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잖아.”“왜? 너 할래? 이 오빠?” 서로가 많이 취한 상태였지만, 하면 안 되는 말을 내 뱉기에 오늘은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 했다.그 때 먼저 정화가 발끈했다. “야! 말을 왜 그따위로 해?”“왜? 싫어서 그래? 너 적당한 남자 만나는 거 좋아하잖아? 이 오빠가 딱 적당하기도 하고.” 곧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 둘을 말렸다. “그만들 해. 내가 취해서 말이 많았네.” 서로가 말없이 가만히 있을 때 채린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었다.번호를 확인하며 먼저 집에 간다고 일어서는 것을 보니, 분명 남자 전화였다.횟집을 나가는 채린의 뒷모습을 보던 정화가 내게 말했다. “친구라고 편드는 것은 아닌데, 채린이도 채린이의 방식으로 오빠를 사랑하는 거니깐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그렇게 지난달에 횟집에서 술자리를 가진 후에 처음으로 통화를 하는 정화였다. “아침부터 채린이는 분위기 안 좋던데. 식사는 늘 꼭 챙겨 드시나 봐요. 조금 전에도 씩씩 거리던데. 둘이 무슨 일 있어요?”“아니, 그런 거 없는데? 혹시 무슨 말 하든?”“안 그래도 채린이가 남자 한 명 소개 시켜 달라고 해서 뭔 일 있나 싶어서 궁금해서요.” 분명 채린이와 가장 친한 친구가 내게 고자질 하려고 전화 한 것은 아닌 건 분명했다.아마도 한 번 떠보라고 시킨 것 같았다. “아냐, 별일 없었어.”“채린이에게 이따가 남자 소개 시켜주기로 했는데.”“아? 그래?”“오빠 별로 안 놀라네요?”“아냐, 너무 놀라서 입이 붙어 버린 걸?”“사실은 채린이가 부탁해서 전화하긴 했는데요, 미안해요. 그래도 일단 거기로 가셔서 데리고 가세요.”“알았어, 고마워.”“빈말은 아닌데요. 오빠도 운동 조금만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너무 채린이에게 휘둘리지 마세요.” 정화는 초밥집 상호를 가르쳐 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돼지국밥집에서 밥도 먹지 못한 채, 차를 돌려 정화가 가르쳐준 초밥집으로 갔다. 채린은 어떤 남자랑 단 둘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우두커니 서 있는 날 발견 못했는지 둘의 대화에서 웃음소리가 오고갔다. “채린아…….” 내게 고개를 돌린 채린은 전혀 놀라지도 않은 채, 눈을 흘겼다. “흥! 누구세요?”“채린아, 도대체 나랑 뭐하자는 건데!”“오빠는 채린이에게 애정이 식어서 다른 인연 만나려 왔어! 왜?” 누구에게 들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쓰는 사람은 피하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평소에는 못 느끼다가 방금 이 말을 듣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우리 둘이 대화 하는 것을 본 낯선 남자는 빙긋이 웃고만 있었다.나이도 한참 어려 보이던 그는 아마도 이 연극을 하기 위해 임시로 데리고 나온 남자인 것이 분명했다. “나 채린이에게 애정 안 식었어.”“아니, 내가 보기엔 나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그녀의 투덜거리는 말에 그 동안 참았던 말들을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만날 때 마다 사랑확인? 애정확인? 네게 선물 못 사주면 내가 너 사랑 안 하는 거니!” 채린은 방금 들은 말이 기가 차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 눈빛 뭔데? 칼 한 자루 쥐어주면 나 내일은 저승에 있는 거 아냐?”“뭐라고?”“그리고 사랑하면 원래 다 해주고 싶은 거 아니가? 내가 진짜 가방 받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식당 안의 사람들 시선들이 우리 둘에게 번갈아 오고 갔다.그리고 식당 주인은 말리려다 험악한 분위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표정으로 저 앞에 서 있었다.식당안 분위기를 살필 때 채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진짜로 오빠가 내게 가방을 사 줄 만큼 사랑하는지 확인 하고 싶었단 말이야!”“그럼 이야기가 원점이로 돌아가네. 채린아. 구찌인지 뭔지 그거 못 사주면 어떻게 되는데?”“그럼 오빠가 나 사랑하지 않는 거니깐 여기서 접어야지.”“너랑 나랑 종이 접기처럼 간단히 만난 것도 아닌데. 뭘 접어?”“이상한 농담하지 말고. 나 저 남자랑 잘 해 볼 거니깐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 채린은 자리에 다시 앉았고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잔잔한 미소를 보이며 인사하듯 고개를 까닥거렸다.약간이나마 남아있던 정마저 털어버렸다. 그리고 정말 이별을 하려 마음을 굳히며 식당을 나왔다. ‘그래. 우리 질긴 인연 이제 여기서 끝내자. 진짜로 끝내자.’ 한참을 멍하니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 분한 감정인지, 답답한 감정인지, 모를 이 감정을 풀고 싶었다.그래서 그 동안 여친을 만난다고 잘 만나지 못했던 오래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내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친구 살아있네?”“그러게. 동훈이, 넌 잘 지냈냐?”“당연하지! 안 그래도 조만간에 연락하려고 했는데. 요즘 어때 살 좀 빠졌나?” 채린이 때문에 쓸쓸해진 기분을 약간이나마 풀고자 웃음을 섞어 농담으로 받았다. “더 쪘다!”“그래? 이제 굴러다니겠네.”“이 새끼 우째 알았냐? 주글라꼬,”“근데 왜 전화 했냐? 이상한 여자 만나서 한동안 잠수만 타던 놈이.”“그 이상한 여자 때문에 답답해 죽을 것 같아서, 이왕 죽는 거 술 마시다 죽으려고 전화했지. 한잔하자.”“지금?”“응, 지금.”“제수씨랑 뭔 일 있었냐?”“제수씨는 무슨! 재수 없게! 오늘 무슨 일 있었는지 만나서 얘기해줄게.”“오, 그 동안 음악 했냐? 라임이 살아있네. 그럼 내가 1시간만 아니, 30분만 있다가 다시 전화할게”“30분은 왜? 바로 안 나오고?”“그런 게 있어. 너무 깊이 알려고 하지 마. 이따가 전화할게.” 동훈이와 통화하며 농담도 주고받다 보니 기분은 좀 나아졌다.그리고 다시 전화 준다는 말에 혹시나 외로워진 내게 급하게 여자를 소개시켜주려나 하는 기대감도 생겼다.다시 동훈에게 연락이 오고 나서 예전에 자주 갔던 호프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먼저 도착한 호프집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 없이 예전 느낌 그대로였다.이 호프집에서 예전 사귀었던 설희와 같이 즐거웠던 아련한 한 때를 떠올리며 친구를 기다렸다.잠시 후, 동훈의 모습이 보이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혼자 멍 때리며 뭐하냐?”“너 혼자 왔냐?”“그럼 이 시간에 혼자지 누구랑 같이 올 줄 알았냐?”“진짜? 난 또 전화를 다시 준다기에 여자라도 한명 데리고 나올 줄 알았지.” 동훈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여자에게 별 관심 없던 내 친구 맞냐? 다른 약속이 있어서 취소한다고 30분 달라고 한 거였어.”“여자였냐?”“남자겠냐?”“남자겠지, 네 주제에.”“어쭈? 나중에 형아가 착한 여자 소개 시켜줄려고 했더만 안되겠네?”“형! 사랑해! 근데, 보통 소개 해줄 땐 예쁜 여자라고 하지 않나? 착한 게 우선으로 말할 정도면 음, 그래도 일단 사랑해.” 친구와 농담을 주고받던 중에 주문을 받으러 온 여종업원이 대화를 엿들었는지 옅은 웃음을 보이며 서 있었다. 맥주와 안주를 시켰고, 주방에 주문을 넣은 종업원은 종종 우리가 앉은 테이블을 쳐다봤다.한 번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종업원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종업원은 대학생 알바처럼 보였고 알바 경험이 많아 보이진 않았다. ‘설마 저 어린애가 날 봤던 건 아니겠지? 그냥 신기해서 쳐다본 건가?’ 친구와 그 동안 쌓여있던 얘기를 하다가 눈치를 보고 늘 궁금했던 설희의 근황도 물어보았다.나와 헤어지고 만난 남자와 아직 사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괜히 씁쓸해졌다.곧 결혼까지 할 것 같다는 말에는 눈물까지 날 것 같았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설희와 동훈은 한동네에 살면서 어렸을 때부터 자주 어울렸었다.특히 설희는 바로 옆집에 살아서 등교도 매일 같이 하다시피 했었다.서로의 집에 자주 들락거리고, 성장기 시기의 고민도 서로 공유하다, 후엔 친구가 아닌 첫사랑이 되었었다.술을 마시며 설희의 얘기를 계속 듣다보니 순수한 사랑을 하던 때가 생각나 감성적인 기분이 한참 올라왔다.그 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별 생각 없이 휴대폰을 집어 드니 휴대폰 창에 채린의 번호가 찍혀있었다.술 때문에 조금 취기가 오른 상황이라서 그런 걸까, 아님 때마침 흘러나오는 호프집의 음악이 애잔해서 일까, 막상 그녀의 전화에 마음이 말랑말랑하게 약해져 있었다.친구를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녀였다.그리고 동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안주 삼아 했었기에, 난감한 상황이라 휴대폰을 들고 호프집 문을 나서서 전화를 받았다.채린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로 그렇게 가냐!”“네가 사라지라며?”“그렇다고 진짜 가냐? 진짜 오빠 재수 없다.”“그럼 내가 너희 둘 앞에서 뭘 해야 됐었는데? 말해봐! 가방을 못 사준다고 무릎이라도 꿇었어야 했냐? 진짜로 넌 날 사랑하기는 했어? 사랑하기는 했냐고!” 가만히 듣고 있던 채린은 거짓말로 답을 해주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입술을 허락할 정도로 난 헤프지 않아.” 모른 척 했지만 예전 같이 나간 동창 모임에서 다른 남자와 입맞춤을 하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한창 그녀를 사랑하던 시기라서 그 사실을 얘기 하면 미련 없이 날 떠날까봐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그 기억들을 삭혀 없애려 했었다. 거의 다 삭혔다고 생각했는데 방금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화가 났다.그리고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못한 말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딴 놈이랑은 잘도 키스 하더만. 나하고 할 때는 입술 아프다고 늘 피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리고 가슴은 왜 아파? 또 뭐 방광염? 나한테만 아픈 거야?” 채린의 당황하는 숨소리가 들려오고, 무슨 말을 생각하는 듯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그 때 등 뒤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다다다다다)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뒤돌아보자, 호프집에 그 어려 보이던 종업원이 서 있었다.당황한 채린의 숨소리만 들려오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쭈뼛쭈뼛 앞에 서 있는 그녀에게 소리 없는 입모양으로 말했다. “왜요?” 궁금해 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여종업원은 굉장히 난감해 했다. “그냥 가신 줄 알고요. 죄송합니다.” 고개를 깊이 꾸벅 거리던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화가 나던 중에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적만 흐르던 전화를 끊고 넌지시 농담을 던졌다. “저 술값 떼어먹고 갈 사람은 아닌데요? 안에 친구도 있고.” 빙긋 웃으면 시선을 맞추려 했지만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뇨, 사실... 그게 아니라... 인상이 좋으셔서 휴대폰 번호라도 받으려고…….” 순간 잘 못 들은 것 같아 내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네? 내 번호를요? 정말로요?”“아뇨, 아니, 아니, 네. 그러니깐 폰 번호를…….” 나만큼 아니, 나 이상으로 당황하는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자, 그녀는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마음을 진정 시키고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휴대폰에 내 폰 번호를 찍어주었다. [010-1234-5678] 휴대폰을 건네받은 그녀는 꾸벅 거리며 인사를 하고 다시 호프집 안으로 들어갔다. 1부 끝
진짜킹카작성일
2025-08-10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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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송영규 사망, 경찰 "범죄 혐의점 無...유족 뜻 따라 부검 검토"
https://v.daum.net/v/20250804113630655송영규 사망, 경찰 "범죄 혐의점無…유족 뜻 따라 부검 검토"조연경 기자2025. 8. 4. 11:36번역 설정글씨크기 조절하기이미지 크게 보기배우 송영규(54)의 사망이 확인 된 가운데, 경찰이 추가 조사와 함께 부검 여부를 검토 중이다.고(故) 송영규는 4일 오전 경기 용인시 처인구 소재 도로변에 정차된 차량 내부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경기 용인동부경찰서는 오전 9시 15분께 "차량 안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는 신고를 접수하고 현장에 출동했다. 신고는 지나가던 한 행인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현장에 도착한 경찰과 119구급대에 따르면 현장에서는 외부 침입 흔적이나 범죄 혐의점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사망 원인을 단정할 수 없어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를 진행 중이다. 경찰은 "유족 측과 협의해 부검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라고 전했다.고 송영규는 최근 음주운전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지난 6월 19일 오후 11시께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서 처인구까지 약 5㎞를 만취 상태로 직접 운전하다 적발, 음주 측정 결과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 취소(0.08% 이상) 수준으로 나타났다.이후 약 한 달 가량이 지난 지난달 말 수원지검에 불구속 송치 된 사실이 공개되면서 출연 중이었던 프로그램에서 줄줄이 하차 및 편집 수순을 밟았다. 공연 중이었던 연극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서는 하차했고, SBS '트라이', ENA '아이쇼핑' 제작진은 송영규 출연 분량 편집을 예고했다.경찰은 추가 범죄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을 경우 유족 뜻에 따라 사건을 종결할 방침이다. 고 송영규의 빈소는 용인시 다보스병원 장례식당 특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6일 오전 8시, 장지는 함백산 추모공원이다.한편, 1994년 어린이 뮤지컬 '머털도사'로 데뷔한 송영규는 영화 '극한직업' 최반장으로 대중에게 익히 잘 알려져 있으며,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 디즈니+ 시리즈 '카지노' 등 굵직한 작품을 필모그래피로 최근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조연경 엔터뉴스팀 기자 cho.yeongyeong@jtbc.co.kr (콘텐트비즈니스본부)Copyright © JTBC.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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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자작]한국교회목사님들이 절대 말 안해주는 한국교회이야기-3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제가 휴가철이다보니, 조금 내용의 양이 적을 수도 있습니다. 휴가가 어째 체력적으로 더 힘듭니다.ㅠㅠ 이번편은 한국 개신교인의 DNA 중에 ‘기복신앙’에 이어 또 하나의 큰 뼈대를 이루고있는 ‘반공주의’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1세기인 요즘에도, 예배 시작을 알리는 대표기도에서나, 설교시간, 끝나는 기도, 심지어 축도에서도 갑자기, 진짜 뜬금없이 “그러니까 이 땅에 만연한 악한 공산주의 사상을...또는 유물론을..또는 공산주의세력을....” 뭐 이런 워딩이 숨쉬 듯 튀어나옵니다. 그냥 듣고만있으면 여기가 남한인지 북한인지 헷갈릴정도에요.. 그래서 알아봤습니다. 왜 이 양반들이, 특히 목사들과 장로들같은 소위 교회의 핵심지도부층이 아직도 ‘반공주의’에 벗어나지못하는 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왜 아직도 계승되어오고 있는가? 시작은 1945년 일제패망 후, 해방을 맞은 북한, 평양에서 시작됩니다. 평양, 김일성한테 빼앗긴 ‘동양의 예루살렘’ 해방 후 북한은 소련의 공산화가 시작되면서, 김일성이 슬슬 센터를 잡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 공산당은 뭐 진짜 그 당시 공산주의는 유물론에 입각해서 진짜 개신교인을 탄압했습니다. 그 때 김일성의 티배깅이 대단했던게, 예전에도 제가 강조했듯이,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으로 일제강점기때는 개신교로 흥했다고 했잖아요? 1907년 대부흥이 있었던 교회를 포함하여 왠만한 교회를 다 쓸어버리고, 특히 대부흥때 그 교회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워버립니다.ㅎㅎ 우상숭배를 죄악시 하는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뭐 눈이 돌아갈 만 하긴합니다. 그 외에 소련군에 대한 개신교인의 범죄제한을 풀어버려 북한의 개신교인에 대한 범죄행위가 대단했다고 합니다.(출처: 한국전쟁 전후 개신교 탄압과 학살 연구 - 박명수 / 서울신대 명예교수 논단 : 교회와신앙 / 故 한경직 목사가 증언한 해방 후 북한, '비밀청원서' 발견 – 강려원 / YTN) 서북청년단의 결성 그렇게 1945년 후반, 북한의 공산화를 피해 장로교 출신의 ‘한경직‘이라는 목사가 월남하여 서울에 내려와 나중에 우리나라 최초의 대형교회가 되는 ’영락교회‘를 세웁니다. 그 뒤로 영락교회는 북한의 월남민의 중심네트워크 역할을 하면서, 점차 세를 불려나갑니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귀국하여 유창한 영어실력에 같은 개신교신자이면서 야심가인 한 정치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이승만’입니다. 법보다는 주먹과 칼이 난무하던 무법시대, 쓸만하게 조용하고 은밀한 일에 믿음직하게 써먹기 좋은 주먹들이 필요했는데, 영락교회의 북한에 대한 증오가 쌓인 패거리들이 이승만 입장에서는 딱 좋은 패였죠. 게다가 서로 신사참배에 얽힌 친일에 대한 부채의식도 꽤 커서, 이를 덮을 만한 공공의 적이 필요한 상황에서, ’ㅃ갱이‘프레임 만 잘 씌워주면 과거가 어쨌든 덮어놓고 뭐든 잘 지나갈만한 상황이었죠. 그리고 1946년 11월 30일, 서울 YMCA 강당에서 영락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서북청년단‘ 또는 ’서북청년회‘ 라고 불리는 한국개신교 역사상 가장 최악의 단체가 결성됩니다.(출처 : ‘서북청년’에 뿌리 둔 한국 개신교의 주류 - 허미경 선임기자 / 한겨례) 서북청년단의 악행 - “마치 나치와 KKK를 합친 것 같다. by 미군정청.” <제주4.3사건 기록물 - 여기 사진의 인물들은 촬영후, 모두 사살당했습니다.> 뭐 그 뒤로 이 ‘서청’이 직접 또는 연루된 악행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주 4.3사건 : 사망자 3만명 추정 여순사건 : 천명 추정 보도연맹사건(일부가담추정) : 수천~수십만명 추정 거창양민학살 : 1,400명 추청 자세한 내용은 모두의 정신건강과 시간여건 상 생략하겠습니다. 제주 4.3사건하고 거창양민학살은 영화화되었구요. 소설 태백산맥에서 요 사건들 다루고있으니까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출처 : 역사로 보는 서북청년단, 대체 어땠길래? / [언론네트워크] <김관후의 4·3칼럼> 서북청년단, 제주도 학살 최선봉에 서다 / 프레시안) 그래도 그 만행 중에 한 대목 만 소개해 드리자면...[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꼴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 출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71쪽] 요게 다시 말씀드리면, ‘기독교’인 이름으로 그 잘난 ‘반공주의’로 저지른 사건입니다. 그리고 서북청년단의 최후...그리고 현재? 공식적으로는 1948년 대한청년단이 창립되면서 그 쪽으로 흡수통합처리됩니다. 그리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조직원 대부분이 사라졌다고 알려져있었습니다만..(일부 서청단원들은 1948년 육사에 들어가서, 박정희의 5.16의 주축이 되기도 합니다.) 서북청년단을 키운 영락교회는 살아있습니다. 애초에 서북청년단 단원들의 80-90%가 독실한 개신교도에 1945년 월남한 이후부터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꾸준히 신자들에게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가르쳐왔어요. 게다가 해방 직후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600만명 이상 이북 주민들이 남한으로 월남했는데, 이들의 상당수가 자신들의 반공이념과 맞고 같은 고향인 서북청년단 출신 목사들이 운영하는 교회로 가서 그들이 가르치는 극단적인 반공주의 설교를 들으며 자랐다고 합니다. (심지어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학자 중 일부는 월남한 이북민 개신교도가 한국의 숨은 권력자가 아니겠느냐? 하는 의구심을 품는다고 하죠.) 그리고 28년뒤 1989년쯤 기득권 내에서 요상한 유행어가 돌기 시작했으니,“비행기를 타려면 티케이(TK) 노스웨스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타라.” 이 말인 즉슨, 요직을 죄다 차지한 대구,경북에다 추가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의 상당수가 이북 출신들,노스웨스트, 과거 서북청년단에서 유래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대형교회의 상당수가 서북청년단 개신교인에 뿌리를 두고있구요. 2000대 중반 서북청년단원 출신 곽선희목사가 세운 ‘소망교회’에서 대통령까지 나오게되었죠.(출처 : ‘서북청년’에 뿌리 둔 한국 개신교의 주류 - 허미경 선임기자 / 한겨례) 그리고 1989년쯤 그 막강한 영향력을 기반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개신교 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 설립됩니다. 그리고 역시 그 뒤에는 영락교회가 있었죠. 또한 서북청년단 출신의 사람들도 주축이 됩니다. 시간이 흘러, 한기총에서 그들을 스승으로 모신, 그들의 후계자! 그들의 미래! 그들의 아이돌! 전광훈목사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2025년 전광훈목사의 아이들이 서부지법 담장을 넘어 창문을 깨고 불을 지르려고하고, 각종 기물을 부수는 등 폭동을 일으키고, 그로부터 몇 달 뒤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한 소년이 자신의 망가진 인생에 대해 눈물을 흘립니다. (출처 : 한기총이란 무엇인가? - 한기총의 탄생·변질·몰락의 역사와 그 현황 - 박제민(기독교윤리실천운동 활동가) 마무리 마지막으로 이런 내막을 알게되면, 누가누구에게 ㅃ갱이라도 모욕해야 할지, 참 난감해집니다. 어떻게 보면 북한 출신 친일파 친구들에게 수 십년 간 지금까지 한국이 농락당하고 있다고할까요? 반공과 폭력은 대대로 남아 최근까지 우리가 그걸 목도하게되었구요. 그런걸 볼 때마다 근현대사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구나, 인간의 타락과 욕심은 끊기지를 않는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제와서는 교회에서는 왜 ‘반공’을 해야하는지 그 이유조차 퇴색되어버렸습니다. 예전이야 김일성의 티배깅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흘러 이유는 잊혀져버리고, 그냥 습관성 반공 만 남았어요. 그게 목사들이 그들을 따르는 성도들한테 써먹이는 좋거든요. 공포마케팅으로요. 예전에 전쟁을 일으킨 무시무시한 미지의 적, 뭐 무섭잖아요? 요즘은 별로 안무서우니까 다른 적을 찾기 시작한 게, 그게 민주당이고 그게 동성애자이긴 합니다.(요즘 진짜 민주당이 공산당이라고 합디다) 공통점은 때리기 좋은 상대들. 맞아도 가만히 있는 상대들. 약한 자들. 예전 남한 내 공산세력이 가지고있던 포지션이었죠. 반공주의라고 떠들어대는 애들이 뭐 다 이렇게 비겁한 애들입니다. 이제 이 타락한 성직자들이 권력과 손을 잡았으니 어떻게 권력을 탐하는지,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다음편은 드디어 한국사의 빌런하면 빼놓을 수 없는 그 사람 ‘이승만’, 그리고 그 중에서 기독교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겠습니다. 부제는 [목사대통령 이승만과 제헌국회예배]로 하죠. 아마 다음 편을 보시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하신 이 땅에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ㅎㅎㅎ 꽤나 충격적이실 겁니다.
아루리작성일
2025-08-03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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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자작]한국교회목사님들이 절대 말 안해주는 한국교회이야기-2
안녕하세요. 두번째입니다. 지난 한국 개신교 개판의 역사를 초장기부터 더듬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저것 소재욕심에 막 넣다보니 글이 길어져서 줄이고 쪼개고 하다보니 정신이 없네요. 그래도 저도 첨보는 소재들이 계속 알게되어 그런쪽에서는 기쁩니다.ㅎㅎ생업이 있는 관계로 일주일에 한번 밖에는 글을 쓰지는 못하네요..ㅠㅠ 일단, 1907년 평양대부흥, 개신교의 부를 수 없는 아버지, 도사 길선주의 활약으로 일단, 개신교는 전국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을 중심으로 장로교를 중심으로 농촌 지역까지 교회가 전국 각지에서 세워지면서 기독교 공동체 네크워크가 형성됩니다. 그래도 이 네트워크를 통해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는 데 큰 역할도 합니다. 진짜로 한국 개신교 초반에는 민족운동의 기반이 된다니까요?ㅎㅎ 이때 안창호와 유관순이 개신교출신 독립운동가로 활동을 했습니다. (출처 :캠브릿지대학 / 한국 개신교 성장의 정치적 요인 : 개신교와 1919년 3·1운동.) 다만, 3.1운동 이후 개신교의 민족운동 성향이 계속 거슬려하던 일제는 1935년 조선총독부에서 모든 학교에부터 신사참배를 강제화하고,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일제가 전시총동원 체제로 전환하면서 ‘내선일체’를 그때부터 사용했구요, 조선 내 모든 종교에 신사참배 ‘거부 불가’ 명령을 내립니다. 불응하면 교회 폐쇄와 체포한다는 내용이었죠. 1930년대 중반까지 장로교회는 신사참배를 명백한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거부했고, 평양 산정현교회 등에서 그 ‘주기철’목사가 “신사참배는 할 수 없다.”고 외치면서 저항했죠. 1938년 평양총회 : 민족종교 VS 개x교 – 운명을 가른 결정 1938년 평양에서 열린 조선예수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한국 장로교회, 아니 한국 개신교 운명을 가른 결정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총회 개막 전부터 일제는 총회 결의를 신사참배쪽으로 강요함다. 총독부 경찰과 친일 세력을 주변에 뿌려놨구요, 총회 안에는 사복 경찰을 잠입 시켜놔서 안팎으로 완전 감시 속에서 회의가 진행되었슴다. 만장일치로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요 의례적 국가의식”이라는 결의를 채택하여 신사참배를 허용한다는 선언을 하게됩니다. 총회 폐회 후, 총회장은 각 교회에 목회서신을 보내 “신사참배 결의를 거역하는 자는 교인으로도 인정할 수 없으며, 총회의 결의를 거역하는 것은 주님의 뜻에 배반되는 유감천만의 행동으로 교회에서 처벌해야 한다.”고 지시합니다. 여기에 더해 반대자 색출과 징계, 친일 목회자들을 앞에워 교회를 통제까지 합니다.(출처: 총신대 정암신학강좌 1994, “신사참배 문제를 재검토한다.”) 조직적 친일 협력의 전개 장로교회는 1938년 총회의 결의 이후 조직적으로 완전 친일의 길로 들어섭니다. 총회 결의문에서 나오듯, 조선예수장로회는 황국신민의로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이후 전쟁 지원을 위한 각종 친일 활동을 전개합니다. 각 교회 예배 순서와 행사에 국기(일장기)에 대한 경례(헐?), 황국신민 서사 암송(헐??), 도쿄의 천황성을 향해 절을 하는 궁성요배(헐???) 등의 국민의례가 도입되었습니다. 다시말하면 이거, 교회 예배때 하는겁니다. ㅅㅂ 조사하다보니 교회 이름으로 온갖 친일행위가 있는데, 더 쓰면 지루할까봐 생략은 하겠는데, 그냥 보통의 친일파가 할 수 있는 친일행위는 다했습니다. 어떤면에서 진짜 대단하네요.. 심지어, 일요일에 친일헌금도 모아서 일본에 갖다 바쳤습니다. 허.. 뭐 나중에는 모은 헌금으로 총이랑 비행기도 사서 일본군에다가도 바치네요. 이런 시부랄.. 그러다가 이마저도 굴욕적으로 1943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강제로 해산당하고 일본이 기만적으로 자기네가 자체적으로 만든 조선장로교단으로 편입됩니다. 이로써 한국 장로교회는 공식적으로 일본 기독교 산하 조직으로 흡수되버립니다.(출처: 박용규,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강요와 저항』, 총신대.) 우리편 : 저항과 순교의 기록 그래도 정말 아주 소수의 양심은 끝까지 참배를 거부했습니다. 앞에 언급한 주기철 목사 외에 몇 명의 목사, 수십 명의 신사들이 절하기를 거부하여 투옥되었으며, 결국 주기철목사는 수차례 구속과 고문으로 인해 1944년 평양 형무소에서 순교합니다. 여기서 수차례 구속이 나오는 게, 한 사람의 뜻을 꺾으려고 잡고 조지고 풀어주고, 또 잡고 조지고 풀어주고, 그렇게 사람이 죽을 때 까지 합니다. 또 조지는 방법도 개같은 게, 가족 앞에서 사람을 조집니다. 이 광경을 본 주기철 목사의 아들이 충격으로 실어증까지 앓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장로교 총회에서는 총회 결의 이후 주기철 목사를 공식 면직하고 그의 가족을 교단에서 추방해버렸습니다. 뭐 해방 이후 다시 복권시키고 순교자가 되긴 하지만요. (출처: 박용규, 『순교자 주기철』) 장로교회의 분열 : 돌아온 자들 VS 위선자들 해방 후 신사참배의 죄와 책임을 두고 당연히 장로교회 내부는 개판이 되었슴다. 회개와 제명처리 논쟁으로 1952년 분열까지 됩니다. 여기서 우리의 그 소수의 아군이 생깁니다. 해방 후, 그 개같았던 친일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회개와 과거사 청산 요구가 미친 듯이 제기되었지만, 교단 지도부는 9년간 이리저리 미루며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사참배에 끝까지 반대하다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 감옥에서 나온 이른바 ‘출옥성도’들이 교회 재건과 회개의 목소리를 강하게 냅니다. 전투력 만땅에 빡이 머리끝까지 쳐있을 만 하죠? 이들이 배신때린 새ㄲ들 죄다 조지라고했는데, 실제로 책임자 처벌까지 이뤄지지 않았슴다. 결국 한상동 목사 등 출옥성도들은 “좋같은 위선자, 친일파, 배신자 새ㄲ들, 회개하지않는 새ㄲ들하고는 함께 할 수 없다.”며 교단을 이탈해버립니다. 이렇게 1951~1952년 고려신학교파(고신파)가 형성됩니다. 부산에있는 고려신학대학교,고신대가 여기 고신교단 소속 신학대학교입니다. 고신교단 지독한게,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년 총회 때 개회 시마다 과거 80년전 평양에서 있었던 제27회 개판 총회에서 결의된 신사참배 가결을 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워딩은 해마다 바뀌긴 하는데, 내용은 똑같습니다. 대대로 굴욕의 역사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의지에 눈물이 납니다.ㅠㅠ 또한 1953년 기존의 장로교회 중에 소수 양심파에서도 “시부랄, 도저히 못참겠다. 니네 새ㄲ들은 양심도 없냐? 고신 애들이 그렇게 회개하라는데, 이런 얼굴에 철판깔은 놈들.. 니네랑은 같이 못살겠다.” 하면서 뛰쳐나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교단이 기독교 진보 또는 기독교 좌파라고 불리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입니다. 그 유명한 민주화운동의 목사님, 한빛교회 ‘문익환’목사님께서 여기 기장교단 소속입니다. 또한 한신대가 기장교단소속 신학대학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분열을 겪은 장로교회에서 놀란 나머지 뒤늦게 “내가 잘못했다!!.”하고 1954년 신사참배 취소성명을 냈는데, 그마저도 친일행위에대한 사과, 피해자에 대한 책임인정, 가해자 처벌, 피해자 보상, 구조적 개혁은 없고, 그냥 ‘내가 좋나 미안하다!!!.’ 로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ㅅㅂ 50년 뒤에 ‘밀양’같은 영화가 나오는 거라고 이 ㅂㅅ같은 ㅅㄲ들아!! 그것도 기독교 모욕하는 영화라고 뭐라하더라?? 제발 반성좀 해라.. 뭐 그 뒤로 1959년 천주교와의 신앙적 입장차이로 인해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으로 대분열을 겪은 후에 조각조각 더더더더더 분열되어서 현재는 공인 장로교단이 대충 300개, 비공식 500개정도로 추산되고 있습니다..(출처 :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신사참배쉬소성명”(1954)연구]. 안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 [신사참배 문제를 재검토 한다] 총신대학교, 1994 정암신학강좌 발표문 / 통계자료 : 한기총) 장로교회의 사생아 - 통일교의 탄생 또 요당시 장로교회가 한국사회에 본의아니게 진짜 큰 해악을 끼친게, 1954년 문선명의 ‘통일교’라는 사생아를 태어나게 만들었죠. 신사참배와 그 외의 친일행위와 더불어 전혀 반성하지 않는 장로교회의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고, 기존 교인들은 장로교회에 도덕적 환멸과 함께 믿음조차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온게 문선명입니다. 장로교회 집안에서 자라난 장로교 교인이었던 문선명은 장로교회를 ‘타락한 종교’. ‘실패한 신앙’으로 규정하면서 ‘오직 나만이 예수님의 구원 사명을 이어받아 완성할 수 있다.’는 시작은 좋은데 끝이 이상하게 끝나는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했습니다. 문선명도 첫 활동을 평양에서 시작했는데, 역시 길선주의 영향을 받는 것인지, 본인이 예수의 환상을 봤으며 자신이 예수의 선택을 받은 ‘예수의 사명 계승자’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참 뭐라 할 말이 없네요. 그럼 다른 교계와 다른 종교는 일제강점기때 뭐했나? 뭐 다른 개신교 교단이라고 다를게 없는게, 이승만의 감리교회는 장로교회보다 더 일찍 신사참배하겠다고 배를 드러내까서 꼬리 흔들고 있었구요, 친일행위도 장로교회 만만치 않습니다. 결국 장로교회와 나란히 1943년 일본에 복속되었슴다. 해방 후에 여기는 장로교회보다 결과가 더 개판인데, 여기도 초반에는 내부 갈등을 겪다, 결론은 “야~ 그냥 좋은게 좋은 거지, 우리끼리 싸우지말고 다같이 합치고 덮어놓고가자~!.”로 끝났습니다. 누가 끝내래??? (출처 : [한국 감리교회의 신사참배 대응에 관한 연구]. 협성대학교 신한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천주교, 카톨릭도 잘했다고만 볼 수 없는게, 일본에서 신사참배 강요하니까 바티칸 교황청에서 “얘들아~ 그거 그냥 국가의식이라니까, 그냥 일본 시키는 대로 신사참배해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선 내 저항하시는 빡시친 몇몇의 신부님은 조선을 떠나신 분도 계시고, 남아서 신사참배 한 신부도 있다고 합디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특별한 사과나 참회없이 스리슬쩍 넘어갔구요. 불교는 더 대박인게, 조선 때 숭유억불정책과 원래 일본 내 승려의 존중 문화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했다고 합니다. 이번에 사료조사로 나왔는데, 저도 처음 안 내용이라 좀 머리가 띵하더군요. 그 당시 한국 불교는 거의 일본화 되었구요. 전국에 불자들을 살살 꼬득여서 재산이고 땅이고 논이고 다 뜯어내서 일본에 바쳤다고 합디다. 조선 때 쌓였던 복수심같은 걸 풀었다고 하던데...(스님들 자비심은요..??) 한편 만해 한용운 스님과 같은 몇몇의 스님은 끝까지 저항하셨다는데, 이게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깨닫습니다..ㅠㅠ (출처: 『친일 승려 108인 – 끝나지 않은 역사의 물음』) 100년이 지난 지금 제일 좋같은 건, 저렇게 친일하지 않고 자기 양심과 신념을 지키신 주기철목사님을 100년전 배신자의 후예들이 팔아먹고있다는 겁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국힘에서 민주주의를 얘기하면서 ‘고 노무현대통령의 정신을 이어받자!!.’ 이러고 있는 거랑 비슷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거죠. 왜냐면 개신교에서 대표적인 순교자거든요. 지네들한테는 또 없거든요. 그때는 ㅆㅂ 제명에다 출교까지해서 내버렸으면서 이제와서 좋나게들 팔아먹고 있어요. 더러운 놈들이.. 에효.. 특히..명예훼손 때문에 특정인을 찍어서 말은 못하겠지만, 빤스 좋나게 좋아하시는 분이 좋나게들 얘기하시드라구요. 그 양반 선배들은 어떤인간들인지 다음 시간에 알려드립죠.. 당신 선배는 주기철 목사가 아냐!!!! 그리고 더 좋같은 건, 정작 그 주기철 목사님 후예인 고신교단은 100년동안 정작 아무런 사과나 화해의 선언이나 손길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교단에서 분리된 뒤에 더욱 철저하게 탄압받고 외면당합니다. 암튼 그래서 더 싫어집니다. 하는 짓이 아주 어디 누구누구들하고 너무 똑같아요. 일단 지금까지 확인된 착한 기독교인 교파는 ‘고신’과 ‘기장’으로 현재 2023년 기준으로 고신교단의 교인 수는 378,376명, 기장교단의 교인 수는 208,307명, 그 당시 전체 개신교인 수가 8,460,000으로 나와있을 때, 전체 비율은 7%입니다. 뭐 쫌 더 추가될 아군까지 추정하면 착한 기독교인은 7-10%, 그리고 90-93%가 쓰레기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건 과장 아니에요~)(출처 : 목회데이터연구소) 마치며 제가 원래 이렇게 길게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곧 8.15 광복절이고 하니, 독립기념으로 좀 더 깊게 파고 좀 덜 알려진 내용을 들여다보려고 하니까 내용이 길어졌네요;;; 그동안 미디어에서 독립운동가가 중심이되다보니, 주인공부터 주변인물까지 계속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면서, 조선이 그래도 독립운동이 좀 당연하지 생각했던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료를 뒤지면서 느낀 점은, 큰 벽을 마주한 암담함? 답답함? 1937년부터 조선은 분명 지금의 티벳이나 홍콩하고 다를게 없었다는 거에요. 그때 독립운동가는 지금의 ‘티벳독립운동가’나 ‘홍콩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하시면 감정이입하시기 편합니다. 그니까 미친 짓이에요. 저항? 무장투쟁? 아마 소극적 저항도 못할껄요? 요즘 홍콩에서 누가 독립운동한다는 얘기 들려요? 거기다가 중일전쟁으로 만주벌판에 점점 영토는 넓어가고 있었죠. 지금 일본 극우가 여전히 대동아공영의 뜻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는 합니다. 우리도 뭐 예전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얘기하면서 만주벌판 우리꺼였다. 말타고 놀았다고하면 막 가슴이 웅장해지고 그러잖아요? 그게 뽕이 더 심해지고 그러면 저 미친놈들처럼 되는 거겠죠.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면서 죽을 때까지, 단 하루도 일제가 없는 하늘 아래서 살아 본적이 없는 사람, 그래도 죽을 때까지 겪어 본 적없는 해방과 독립을 위해 저항했던 그를 기리며 마치겠습니다. <이육사> 본명: 이원록(李源祿)호: 육사(陸史) → 수감번호 264에서 따온 것출생: 1904년, 안동 출신사망: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감옥 (일제 헌병대 고문 중 순국) <광야>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다음편은 이제 장로교회에서 남겨진 위선자들이 어떻게 악마가 되는 지, ‘서북청년단’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아루리작성일
2025-07-2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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